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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문학 기자의 돈되는 중국경제]최고 갑부 3번에 옥중 경영 11년 사연 - 오피니언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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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도 중소기업을 9988로 부른다. 기업 수로 따지면 99%를 차지하고 일자리의 88%와 수출의 70%를 담당한다는 의미다.

민영기업이라고 불리는 중국 중소기업은 개혁개방의 산물이다. 소상공인으로 시작해서 중국경제의 기둥으로 성장했지만 업적을 평가할 때도 늘 국유기업이나 외자기업에 밀리는 찬밥신세다.

공정하게 경쟁할 여건은 더 못 된다. 법률이나 제도적인 결핍 때문이다. 고생하며 창업해서 성공을 거두는 사이에 저지른 뇌물 등 비리를 일벌백계하는 바람에 민영기업가는 감옥을 수없이 드나들기 일쑤다.

민영기업인 1세대 전설로 통하는 황광위(黄光裕)은 민영기업 원죄론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가전연쇄점이라는 새로운 업태를 만들며 3차례나 중국 최고 부자에 올랐지만 지금은 뇌물수수 등의 이유로 11년 6개월째 복역 중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내년 2월 가석방될 예정이다. 자본시장에서는 궈메이(国美)의 주가도 오르고 있다. 그만큼 영향력이 있는 기업인이란 이야기다.

그가 감옥에 있는 사이 중국 가전 소매점은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는다. 영업환경은 물론 소비방식도 180도 달라진 상태다.

오프라인 가전연쇄점은 거의 사라지고 대신 온라인 유통이 대세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지난 1분기 중국 가전 시장 보고서를 보면 온라인 판매 비중이 55.8%다.

게다가 가전시장은 공급 과잉이 심각하다. 글로벌 가전시장의 경쟁환경도 예전과 다르다.

아무리 협객기질을 가진 황광위가 복귀한다 해도 제2의 도전 환경이 호락호락하지 않아보인다. 하지만 중국에서 알아주는 기업가 정신을 가진 그를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1969년생인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16세 되던 해 형과 행상을 시작해 20세에 백억 대 부자가 되고 35세에 중국 최고 부자 자리에 오른다.

그의 원래 이름은 쩡준리에(曾俊烈)다. 부친 황창의(黄昌义)가 토지를 몰수당하고 반혁명 분자인 헤이우리우(黑五类)로 분류되자 쩡씨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바람에 관습에 따라 모친 성으로 바꾼 것이다.

천주교 신자인 외갓집에서 자라는 사이 돈을 열심히 불리라는 ‘마태오 이론’을 체득한다. 4형제 중 2남인 그는 22세가 되던 1991년 부친 성으로 고치고 나중에 홍콩 신분증을 만들면서 이름도 바꾼다.

10살 되던 해 그가 살던 산터우(汕头)는 특구로 지정된다. 밀수의 고장이라는 별칭 답게 해외에서 중고 가전을 들여다 되팔아 부자되는 사람이 비일비재하던 시절이다.

형은 중고 가전을 수리하는 기술을 익혔고 초등학생인 그는 그 물건을 순식간에 팔아치우며 장사를 배운다. 1985년 형 황준신(黄俊钦)이 19세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그도 고향을 떠나 장사길에 오른다.

이때 기차에 물건을 실고 도착한 곳이 내몽고다. 내몽고로 간 형제는 큰 돈을 벌었지만 수시로 벌어지는 밀수품 단속에 걸려 옥살이도 여러 차례 경험한다.

베이징(北京)으로 근거지를 옮긴 황은 1987년부터 옷가게를 하나 얻어 장사를 시작한다. 옷을 팔면서 겸업으로 취급하기 시작한 가전제품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끈다.

본격적으로 가전제품 가게를 꾸린 그는 광둥에서 상품을 가져다가 국영상점보다 싸게 판매하기 시작한다. 가전 제조업체에서 물건을 구입해서 소비자에게 넘기는 유통 시스템도 만든다. 이게 중간 유통 비용을 줄인 중국 가전 양판점의 효시다. 1991년 베이징완바오라는 신문에 광고를 내자 1년 새 점포가 10여 개로 늘어난다.

베이징 가전업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부상한 후 형제는 부동산사업도 벌인다. 궈메이전기라는 브랜드는 여동생과 결혼한 장즈밍(张志铭)에게 맡긴다.

1993년 황광위와 인연을 맺은 장즈밍은 이후 수닝(苏宁)의 장진둥(张近东) 산렌(三联)의 장지성(张继升)과 함께 가전 3인방 시대를 구가한다. 황은 이때 1996년에는 베이징대 법대를 나온 장위둥(张玉栋)과 홍콩 투자가인 잔베이중(詹培忠)을 만나 사업에 날개를 단다.

수입 가전도 취급하고 전자 업체를 인수합병하며 해외시장에도 진출하던 시기다.당시 중국 최대 가전 연쇄점 기업이 된 궈메이는 가격할인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친다.

국영 기업이 80%의 시장을 점유한 선양(沈阳) 가전시장에 진출해 1년반만에 시장 30%를 장악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 될 정도다. 삼성 같은 외국 브랜드도 궈메이를 통해 시장을 넓힌다.

베이징 차오양(朝阳)에 궈메이 빌딩을 짓고 형으로부터 펑룬(鹏润)빌딩까지 사들이며 중국 최고부자에 오른 과정은 귀신도 모를 정도다. 장위둥과 잔베이중의 합작품으로 황의 재산은 105억위안(약 1조 8000억원)으로 늘어난다.

그의 나이 35세인 2005년에는 개인 자산 140억 위안을 넘어서고 그의 형도 55억 위안으로 중국 부자순위에서 13위를 꿰찬다. 위기는 2006년 찾아온다.

재경이라는 잡지에 황씨 형제를 조사한다는 기사가 실린 게 10월이다. 중국은행 행장인 니우중광(牛忠光)은 13억 위안을 황씨 형제 부동산에 대출해준 혐의로 체포돼 조사를 받는다.

위기에도 불구하고 궈메이는 질주를 계속한다. 베이징올림픽이 열리던 2008년에는 융러(永乐) 산롄(三联) 다중(大中)을 인수해 가전유통 업계를 평정하고 매출 1200억위안 규모의 세계 500대 기업에도 이름을 올린다.

개인자산이 450억위안으로 최고를 기록한 지 40일 후 경찰에 체포된다. 베이징올림픽이 지난 지 딱 3개월째 되던 날이다.

1년간 재판을 거쳐 확정된 죄목은 내부자 거래와 뇌물공여죄다. 그가 구속되자 궈메이 거침없던 전진도 멈춘다.

궈메이가 내부분쟁을 거치는 사이 경쟁업체인 쑤닝(苏宁)은 인터넷 바람을 타고 호시절을 구가한다. 지난해말 기준으로 쑤닝의 매출은 2692억 위안이다. 궈메이의 600억 위안의 5배다.

징둥도 작년 5769억위안의 매출을 기록한다. 게다가 징둥과 텐센트 그리고 쑤닝과 마윈의 알리바바는 전략적 협력관계다.

최근 핀둬둬(拼多多)에서 2억 위안 들여 궈메이 주식을 사들이는 바람에 외톨이 신세를 겨우 면했다. 그러나 이직도 황의 재산은 16억 달러다.

글로벌 부자 순위로 보면서 1613위로 처져있다. 그렇지만 11년 이상을 감옥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아직도 황의 신화는 중국서 계속되고 있다는 신호다.

이직도 황광위의 기업가 정신 만큼은 평가하는 분위기다. 다만 시대의 낙인자란 견해가 우세하다.

계획 경제에서 생각지도 못한 중고상품을 팔았고 가전 연쇄 소매모델을 창조한 공로다. 당시 불었던 창업 붐은 디지털 혁명과도 같은 평가를 받는다.

밀수로 창업자금을 만들었다는 점을 빼면 그는 기업가의 덕목을 고루 갖춘 인물이다. 특히 상상을 뛰어넘는 저항정신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의 인생역정을 통해 확실히 배울 수 있는 점은 기업가정신이다. 아울러 기업을 기울 수 있는 제도의 정비가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아 보인다.

[현문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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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13, 2020 at 08:43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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